정부의 2035 NDC 논의가 산업계의 의견만을 과대 대표하고 헌법재판소 결정에 부합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어지자 이를 비판하기 위해 시민사회에서 긴급 토론회를 주최했습니다. 청소년기후행동은 기본권을 지킬 수 있는 원칙에 따라 NDC를 세워야 한다고 발언했습니다.
[토론문] 위험을 떠넘기지 않는, 기후위기 속 존재하는 삶을 위한 NDC
지금의 NDC 논의는 기후위기를 ‘얼마나 줄일 수 있는가?’라는 숫자 문제로만 이해하며 사회 전환의 본질을 잃고 있습니다. 원래 NDC는 규제나 기술 계획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구조로 전환할 것인가를 정하는 정치적 약속이자 사회적 설계도여야 합니다. 그러나 수치가 등장하는 순간, 논의의 초점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게 가능한가?’로 옮겨갑니다. 그 가능성은 언제나 산업계의 감내 수준으로 정의됩니다. 산업의 이익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만 정책이 논의되다 보니, 기후 대응은 국민의 생존 조건을 지키는 국가의 책무가 아니라, 산업의 부담을 조정하는 행정 절차가 되었습니다.
NDC는 국제 협약을 맞추기 위한 기술적 합의가 아닙니다. 국민의 안전과 존엄을 지킬 최소한의 사회적 계획입니다. 감축목표는 기업을 옥죄는 규제가 아니라, 기후위기 속에서도 산업이 존속할 수 있도록 사회가 버텨주는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지금 산업이 말하는 ‘경제성’이나 ‘실현 가능성’은 책임 회피의 또 다른 말입니다. 경제성이란 이름으로 국민의 삶이 계산에서 빠질 때, 실현 가능성은 곧 ‘누가 생존할 수 있는가?’를 가리는 수단이 됩니다. 기후위기를 외면한 산업이 ‘성장’을 말하는 것은 모래 위에 건물을 짓는 일과 같습니다. 감축률은 기업이 견딜 수 있는 상한선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하한선이어야 합니다.
정부는 “시간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시민이 함께 논의할 시간을 없애버렸습니다. 기후위기의 긴급성을 내세워 정책 수립을 서둘렀지만, 결정권은 관료와 전문가에게만 주어졌고, 국민은 의견을 제시하는 ‘참여자’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결정을 따라야 하는 ‘대상’으로만 남았습니다. 긴급성은 행동을 촉구하는 말이 아니라 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변명이 되었고, 피해는 미래에 오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 언어들은 산업계의 속도를 지켜주기 위해 사용됩니다. ‘시간이 없다’라는 말이 반복될수록, 정책은 산업의 시간을 연장하고, 우리의 시간을 없앴습니다.
기후위기는 단순히 온도가 오르고 배출량이 늘어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과거에 쌓아온 산업 구조와 에너지 체계, 그리고 그 속에서 만들어진 불평등이 지금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입니다. 과거의 결정이 현재의 위험을 만들었고 지금의 결정이 미래의 불평등으로 이어집니다. NDC 제출 기한 안에 숫자를 채워 넣는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과거의 구조, 현재의 불평등, 미래의 위험이 얽혀 있는 현실에서 결정을 빨리한다고 전환이 실현되지는 않습니다. 진짜 긴급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빠른 결정보다 필요한 것은 ‘누구의 안전을 우선할 것인가?’를 두고 사회가 충분히 논의할 시간입니다. 지금 정부가 반복하는 긴급한 결정은 산업의 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지연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건 빠른 결정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 포함된 결정 과정입니다.
정부의 ‘여러 단위의 의견을 들어 합의한 목표’는, 사실상 과거의 화석연료 산업과 투자 구조를 유지한 채 불평등을 덮는 언어입니다. 전환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는 개발과 투자는 여전히 과거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런 방식의 정책은 과거의 부정의를 현재로 끌고 오고 미래를 다시 과거처럼 만듭니다.
우리는 단순히 온실가스의 감축률만으로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후위기 속에서도 안전하게 존재할 권리, 다시 말해 ‘기후위기 속에서 살 수 있는 사회의 조건’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이를 법의 언어로 확인한 것입니다. 국가는 단지 미래의 재난을 예측하고 관리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불평등한 위험 속에서 국민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결정은 정부 정책의 위헌 여부를 가린 것이 아닙니다. 정부 정책이 국민의 생존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헌법소원 결정의 이행은 ‘어떻게 줄일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답하는 일입니다. 지금의 정책 구조는 국민의 생존을 시장의 효율성에 맡겨두고 있습니다. 효율이 아니라 존재를 지키는 정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존재의 권리’는 살아남는 것을 넘어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포함합니다. 기후위기 속에서도 안전하게 존재할 삶이 보장된다는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 것인가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바로 헌법소원 결정이 가지는 힘이자, 우리 사회가 기본권을 지킬 수 있게 NDC를 다시 세워야 할 이유입니다.
2025.10.21
정부의 2035 NDC 논의가 산업계의 의견만을 과대 대표하고 헌법재판소 결정에 부합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어지자 이를 비판하기 위해 시민사회에서 긴급 토론회를 주최했습니다. 청소년기후행동은 기본권을 지킬 수 있는 원칙에 따라 NDC를 세워야 한다고 발언했습니다.
[토론문] 위험을 떠넘기지 않는, 기후위기 속 존재하는 삶을 위한 NDC
지금의 NDC 논의는 기후위기를 ‘얼마나 줄일 수 있는가?’라는 숫자 문제로만 이해하며 사회 전환의 본질을 잃고 있습니다. 원래 NDC는 규제나 기술 계획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구조로 전환할 것인가를 정하는 정치적 약속이자 사회적 설계도여야 합니다. 그러나 수치가 등장하는 순간, 논의의 초점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게 가능한가?’로 옮겨갑니다. 그 가능성은 언제나 산업계의 감내 수준으로 정의됩니다. 산업의 이익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만 정책이 논의되다 보니, 기후 대응은 국민의 생존 조건을 지키는 국가의 책무가 아니라, 산업의 부담을 조정하는 행정 절차가 되었습니다.
NDC는 국제 협약을 맞추기 위한 기술적 합의가 아닙니다. 국민의 안전과 존엄을 지킬 최소한의 사회적 계획입니다. 감축목표는 기업을 옥죄는 규제가 아니라, 기후위기 속에서도 산업이 존속할 수 있도록 사회가 버텨주는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지금 산업이 말하는 ‘경제성’이나 ‘실현 가능성’은 책임 회피의 또 다른 말입니다. 경제성이란 이름으로 국민의 삶이 계산에서 빠질 때, 실현 가능성은 곧 ‘누가 생존할 수 있는가?’를 가리는 수단이 됩니다. 기후위기를 외면한 산업이 ‘성장’을 말하는 것은 모래 위에 건물을 짓는 일과 같습니다. 감축률은 기업이 견딜 수 있는 상한선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하한선이어야 합니다.
정부는 “시간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시민이 함께 논의할 시간을 없애버렸습니다. 기후위기의 긴급성을 내세워 정책 수립을 서둘렀지만, 결정권은 관료와 전문가에게만 주어졌고, 국민은 의견을 제시하는 ‘참여자’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결정을 따라야 하는 ‘대상’으로만 남았습니다. 긴급성은 행동을 촉구하는 말이 아니라 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변명이 되었고, 피해는 미래에 오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 언어들은 산업계의 속도를 지켜주기 위해 사용됩니다. ‘시간이 없다’라는 말이 반복될수록, 정책은 산업의 시간을 연장하고, 우리의 시간을 없앴습니다.
기후위기는 단순히 온도가 오르고 배출량이 늘어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과거에 쌓아온 산업 구조와 에너지 체계, 그리고 그 속에서 만들어진 불평등이 지금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입니다. 과거의 결정이 현재의 위험을 만들었고 지금의 결정이 미래의 불평등으로 이어집니다. NDC 제출 기한 안에 숫자를 채워 넣는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과거의 구조, 현재의 불평등, 미래의 위험이 얽혀 있는 현실에서 결정을 빨리한다고 전환이 실현되지는 않습니다. 진짜 긴급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빠른 결정보다 필요한 것은 ‘누구의 안전을 우선할 것인가?’를 두고 사회가 충분히 논의할 시간입니다. 지금 정부가 반복하는 긴급한 결정은 산업의 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지연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건 빠른 결정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 포함된 결정 과정입니다.
정부의 ‘여러 단위의 의견을 들어 합의한 목표’는, 사실상 과거의 화석연료 산업과 투자 구조를 유지한 채 불평등을 덮는 언어입니다. 전환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는 개발과 투자는 여전히 과거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런 방식의 정책은 과거의 부정의를 현재로 끌고 오고 미래를 다시 과거처럼 만듭니다.
우리는 단순히 온실가스의 감축률만으로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후위기 속에서도 안전하게 존재할 권리, 다시 말해 ‘기후위기 속에서 살 수 있는 사회의 조건’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이를 법의 언어로 확인한 것입니다. 국가는 단지 미래의 재난을 예측하고 관리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불평등한 위험 속에서 국민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결정은 정부 정책의 위헌 여부를 가린 것이 아닙니다. 정부 정책이 국민의 생존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헌법소원 결정의 이행은 ‘어떻게 줄일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답하는 일입니다. 지금의 정책 구조는 국민의 생존을 시장의 효율성에 맡겨두고 있습니다. 효율이 아니라 존재를 지키는 정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존재의 권리’는 살아남는 것을 넘어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포함합니다. 기후위기 속에서도 안전하게 존재할 삶이 보장된다는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 것인가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바로 헌법소원 결정이 가지는 힘이자, 우리 사회가 기본권을 지킬 수 있게 NDC를 다시 세워야 할 이유입니다.
2025.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