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참여의견서 예시 보기]'매실'님의 글은 헌법재판소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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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마음 한 켠에 소중한 여름의 기억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름이라는 계절을 좋아합니다. 여름에 칠해진 기억들이 저에게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여름이 되어서 학교의 방학이 시작하면 한 달 동안을 할머니 집에서 머물렀습니다. 6살 때까지 절 키워준 할머니였기에, 저는 방학만 되면 할머니를 볼 생각에 신이 났습니다.


할머니 집에서 보낸 여름은 지금도 제가 힘들 때마다 살아갈 용기를 줍니다.

옥상에 올라가면 할머니가 기르는 고추, 오이, 방울토마토, 상추, 대파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고, 고추장, 된장, 간장이 담겨있는 항아리들은 옥상을 수호하는 정령들처럼 굳건히 서있었습니다. 할머니가 텃밭을 가꾸는 동안 저는 커다란 고무 다라이에 호스로 물을 받아 동생들과 물장구 치며 놀았습니다. 방울토마토 따는 걸 도와달라는 할머니의 말에 쪼르르 달려가 방울토마토를 따면 할머니는 저와 동생 입에 토마토를 하나씩 넣어줬습니다. 텃밭에 물까지 다 주고나면 우리는 옥상에서 내려갔고, 할머니는 거실에 누워있는 우리에게 매실을 타주었습니다. 할머니가 담근 매실은 새콤달콤, 혀를 짜릿하게 만드는 맛이었습니다. 저에게 여름은 새콤달콤짜릿한 매실의 맛과 향으로 기억되는 계절입니다.


할머니는 하루종일 봐도 예뻐죽겠다는 듯 저를 바라봤고, 볼 때마다 끌어안고 뽀뽀를 해주고서야 놓아주었습니다. 사랑이 모자르고 모잘랐던 어린 시절, 할머니는 늘 나를 쫓고, 나를 아껴줬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9살 여름, 할머니 집에서 머무는 평소처럼 즐거운 여름방학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배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고, 저에게 진통제를 사오라는 심부름을 자주 시켰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밤 할머니는 응급실에 갔고, 며칠 후 췌장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 시간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엄마는 할머니 간호로 집을 떠나있었고, 아빠는 일하느라 바빠 밤에 겨우 얼굴 한 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외로운 시간에 할머니를 계속 생각했고, 할머니에게 계속 편지를 썼습니다. 하지만 소망은 헛되었고, 고작 5개월만에 할머니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 삶에 닥쳐온 가장 큰 위기를 잘 이겨내지는 못했습니다. 12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할머니와 보냈던 여름의 기억을 붙들고 놓아주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할머니 생각이 나면, 밥을 합니다. 할머니의 음식을 만듭니다. 오이냉국, 가지무침, 수제비, 무말랭이,,, 할머니의 맛과 전혀 똑같지도 않은 음식을 먹으면서 그 여름의 기억들을 떠올리려 애씁니다. 가장 기억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매실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년 여름, 매실을 담그게 되었습니다. 매실을 씻고, 꼭지를 따고, 말리며 할머니의 매실과 같은 맛이 나길 바라는 소망을 담아 담급니다.


하지만 올해 여름에는 매실을 담그지 못했습니다. 몇 년 전까지는 그저 마트에 가서 사거나, 주문하면 되었던 매실이 이제는 보기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기후위기 때문입니다. 매년 4~5월에 미리 매실을 예약해두어도, 작황이 좋지 못하면 매실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번 여름, 저는 매실을 구하지 못해 매실을 담그지 못했습니다. 매실 농사가 폭싹 망했다고 합니다. 이상기온으로 꽃이 일찍 폈는데, 꿀벌들이 줄어들고 제대로 활동을 못해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작년과 재작년에 담근 매실이 아직 남아있지만, 앞으로도 매실을 담그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새콤달콤짜릿한 매실의 맛을 내년에도, 10년 뒤에도 느낄 수 있을까요? 저에게 매실은 할머니를 기억하는 끈입니다. 이 여름의 추억을 놓아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할머니와 함께 하는 여름은 더 이상 보낼 수 없지만, 매실과 함께 하는 여름은 되도록이면 오래 오래 보내고 싶습니다. 모두가 기억하고 싶은 걸 기억하고 잃고 싶지 않은 걸 잃지 않을 수 있도록, 위헌 판결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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